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에서 조봉암을 다루었는데 그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그는 초기에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했고 나중에는 미군 방첩대(CIC)의 회유로 민주주의로 전향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민주주의로 전향한 조봉암 선생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그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조봉암을 민주주의로 전향한 반역자라고 부르며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전으로 바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과 달리 조봉암은 국가의 중요한 문서들을 챙기느라 바로 피신하지 못했다.
정작 자신의 가족을 챙기지 못해 조봉암 선생의 부인은 북한으로 납북되어 사살되었다.
조봉암은 처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조력자였지만 그의 부정부패를 보면서 2대 대선 때부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승만을 도왔다면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국가를 위한 대승적인 행보를 걸었다.
누군가는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이 없었을 거라고 하는데 그를 대신할 인재들은 많았다.
여운형과 김구 등등 있었지만 모두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배후는 미국 또는 우익세력 등등 음모설이 있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로 싸울 사람조차 없다면 국민이 너무 불쌍하다!
당시에는 정치 깡패가 있던 시절이다.
이승만 대통령에겐 이정재가 있었고 조봉암에겐 시라소니가 있었다.
시라소니가 조봉암의 보디가드였다니~~~ 놀라운 사실이다.
시라소니는 일제강점기 김두한과 더불어 최고의 주먹이라 불렸던 남자!
조봉암이 이승만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비판하자 시라소니가 이에 심리적 부담을 느껴 그의 경호를 그만두었다.
그 정도로 조봉암은 이승만 타도에 앞장 섰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질서를 공포로 유지한다.
우리 민주주의 진영은 명랑하고 활발한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1946년 조봉암 선생 연설-
이승만은 자신을 견제할 정도로 조봉암의 지지율이 오르자 그를 훼방 놓기 시작한다.
우선 조봉암의 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를 사살한다.
김성주는 이승만을 따르는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에 실망해 조봉암을 따랐던 것.
이승만은 조봉암이 국회의원 선거 등록도 못하게 교묘한 술수를 써서 정치를 못하게 하는데...
그러나 조봉암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이승만의 발췌개헌과 사사오입으로 국민과 야당으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3대 대선 후보로 조봉암이 다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은 조봉암이 초기 공산주의자였던 점을 들어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대 대선에서 투표에선 졌지만 선거에선 이기는 쾌거를 이뤄낸다.
이 힘을 바탕으로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설한다.
모든 사람들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을 가리켜서 한국의 진보주의라 한다.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 내용-
조봉암의 슬로건은 '뭉치자 피해 대중!', ' 세우자 혁신정치!', '이룩하자 평화통일'이었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북진에 의한 통일이었기 때문에 평화통일이 금지어였다고 한다.
지금은 평화통일을 당연한 듯이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금지어였다니.. 놀랍다.
아마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평화통일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조봉암이었던 것.
평화통일은 이미 UN에서도 사용하던 단어였기에 조봉암은 이 단어, 사용이 위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결국 이 단어로 조봉암은 북한과 내통했다는 간첩으로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양명산이란 인물이 조봉암에게 정치 자금을 전달하는데 그 돈은 북한의 김일성이 준 자금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조봉암은 양명산이 준 돈이 김일성의 돈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조봉암과 양명산은 일제강점기부터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믿었던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평화통일' 단어 사용이 북한과의 내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간첩과 교섭한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 선고를 받는다.
당시 조봉암을 무죄로 판결한 유병진 판사는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하라는 반공세력의 습격을 받기도 한다.
이 판결에 불복한 이승만 대통령은 2심 재판에서 자신과 친한 판사들로 바꾸고 유병진 판사는 법관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2심 재판에선 조봉암의 증인, 증거가 채택이 안되고 양명산은 수사기관의 고문으로 조봉암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고 밝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형 선고를 내린다.
일제강점기 때도 공산주의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적은 없었다.
사법의 이름으로 살인한 진보당 사건.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 사형 선고 뉴스를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막고 유가족을 감시하며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외부에 이 사건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이승만은 이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가들을 사형시키고 나서 한 짓과 똑같은 짓이었다.
미 국무부에서도 조봉암 사형에 대해 공산주의자에게 선전 거리를 제공한 것이고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사건으로 평가했다.
사법 살인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맞지 않는 판결이었다.
차기 유력한 대선 후보를 누명 씌워 죽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부르게 되고 4·19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부정한 권력은 진실을 두려워한다!
<조봉암 선생의 유언>
이박사(이승만 대통령)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11년 1월 20일 간첩죄로 사형당한 조봉암 사건에 대한 재심이 열렸다.
원심 판결과 1심 판결 중 유죄 부분을 파기함으로 52년 만에 무죄임이 밝혀졌다.
사법부가 사법부의 잘못을 인정함.
유가족은 받은 배상금을 민주화 운동을 연구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했다고 한다.
매년 7월 31일은 조봉암 선생의 추모식이다.
※내용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정치·경제·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의 옛 땅 만주국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파헤친다 (1) | 2025.02.15 |
---|---|
알아두면 좋은 공자 명언 모음 (0) | 2025.01.31 |
태평양전쟁 중 포로로 잡힌 호주 간호사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다 (41) | 2024.06.30 |
조선과 명나라를 노략질했던 왜구의 잔인한 역사 (34) | 2023.09.05 |
조선시대 김홍도가 그린 산수화 실제 사진과 비교 (32) | 2023.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