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역사

고구려의 옛 땅 만주국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파헤친다

푸른빛의선풍 2025. 2. 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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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세워졌던 곳으로 우리 역사의 무대였고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을 위한 기회의 땅이었고 현재는 중국 땅이지만 그래서 친숙한 곳이다.

씁쓸한 사실도 있다.

1960~1970년대 우리나라를 이끈 정치계 인사들 중에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많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도 만주국의 교육제도를 본떠서 만든 것이었다.

 

'만주국(滿洲國)'을 집중 분석한다.

 

​​193231일 수립.

처음 인구는 3천만 명 정도 되었고, 1942년에는 45백만 명까지 늘어났다.

 

​​만주국의 영토 크기는 무려 한반도의 5, 일본열도의 3배 이상으로 상당히 넓은 나라였다.

 

 

 

 

뤼순(旅順)과 다렌(大连)은 러시아가 개발하던 도시였는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日本)이 이 지역을 획득하게 된다.

이곳에 주둔하던 군대를 '관동군'이라고 부른다.

 

​​특징은 日本 정부가 아닌 관동군이 개입해서 세워진 나라였다는 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기 불황으로 일본 정부는 군대의 예산을 삭감하고 2개 사단도 없애버린다.

그러자 관동군은 정부에 불만을 갖고 항명을 한다.

일본 정치인 암살을 시도하거나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한다.

 

 

 

 

일본 정부는 관동군에게 요동반도에 주둔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무렵, 관동군의 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는 만주 침략을 주장한다.

일본이 만주를 획득하면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고 중국과 소련으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자작극을 꾸민다.

중국 심양(瀋陽, 중국어 발음 선양)에는 일본 소유의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 있었다.

만철이 소유한 철도를 일본군이 중국인 복장을 하고 폭탄을 설치하여 폭파한다.

즉 중국인이 일본 철도를 공격하게 된 것을 핑계로 만주를 침략한다.(만주사변)

 

그는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과 맞서 싸워야 하며 최후에는 미국과 싸워 이겨야 된다고 주장한다.

뛰어난 군사력으로 만주를 장악한 그는 극우 세력의 영웅이 된다.

 

 

 

 

조선처럼 식민지가 아닌, 관동군이 세운 독립국이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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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부르듯이 만주국의 국기는 신오색기(新五色旗)로 불린다.

 

 

오족협화(五族協和)

 

 

 

 

건국 이념으로 홍보했던 오족협화는 일본인, 중국인(한족), 조선인, 몽골족, 만주족의 다섯 개의 민족을 수용하는 다민족 국가라는 뜻.

 

 

 

 

만주 침략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이 시작되자 관동군은 비난을 우려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운다.

푸이가 청나라 부활을 꿈꾸며 세운 나라가 만주국이고 관동군은 단지 푸이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것이라며 변명한다.

푸이는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한 허수아비였고 관동군의 꼭두각시가 된다.

 

​​19329월 만주국과 일본은 '일만의정서'를 체결한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소유한 모든 권한을 승인한다.

일본군은 만주에 무기한 주둔한다.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의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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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 대신 실세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은 자신이 설계한 작품이라면서 자랑스러워하기도...

 

 

 

 

 

일본은 만주국에서 근대 문명의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중 도시 계획, 고속 철도가 있는데 일본이 자랑하는 고속철도 '신칸센(新幹線)'도 만주국에서의 실험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주는 실험의 장이었고 일본 본토 발전에 이용했던 것.

 

 

조선인 집단부락

 

 

일제는 한반도의 조선인들을 만주국으로 이주시켜서 허허벌판의 땅을 개척하게 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강제 노동에 희생되어 조선인들이 지은 쌀은 모두 관동군의 군량으로 쓰였다

 

사진은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조선인 집단부락'이다.

소련과의 국경지역에 배치했는데 유사시에는 조선인 농민들을 군인으로 징집하기 위해서였다.

 

출입문은 단 한 개고 사방에 울타리를 설치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했다.

도망치는 사람이 생기면 조선인들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 했다.

 

이 정책은 성공하여 조선인의 지원이 끊긴 만주의 독립군이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고 세계 최초로 반정부 게릴라를 진압한 성공 사례가 되었다.

1940년 이후 만주의 독립군은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집단부락 정책은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도 사용되어 미군이 베트남 주민을 한 곳에 모아 베트콩과 분리하기 위해 전략촌(Strategic Hamlet Program)을 세웠다.

 

 

 

 

일본은 조선인 275명으로 구성한 '간도특설대'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소탕하고 독립군에 도움 주는 조선인들을 통제했다.

간도특설대를 조직한 이유는 독립군 탄압만이 목적은 아니었고 조선인의 정신교육으로 징병제를 실시해도 좋을지 테스트를 했던 것이다.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탄압하던 정책으로 일제 입장에서는 성공적이었다.

 

​​간도특설대가 얼마나 악랄했는지 중국인들도 최악의 부대라며 욕했을 정도...

간도특설대의 성공 사례는 1943년 조선인 학도 지원병, 1944년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친일파 중에서도 특급 친일파로 독립군 사냥개로 불리었고 이들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다.

 

2020년 현충원 안장 문제로 논란이 된 고인 '백선엽 장군'도 바로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그는 친일파였지만 6.25전쟁 때는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1945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소련은 160만 명의 군대로 만주국(MANCHUKUO)을 침략한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들어오면 천황제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항복하기 전에 미국과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종전 협상을 벌인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의 13년 역사도 끝을 맺는다.

집정관이었던 푸이는 일본으로 밀항 시도하다가 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고 이후 중국으로 이송돼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모범수로 석방된 푸이는 식물원 보조 관리사로 일하다가 1967년 사망했다.

 

만주국은 망했지만 만주국의 시스템은 계속 남아 있다!”

 

만주군관학교 또는 간도특설대 출신이 광복 후 한국의 정치인이 되어 만주국에서의 경험을 한국에 도입했던 것.

반공 대회, 국민체조, 체력장 시험의 공 던지기 등이 바로 만주국 시절에 행해지던 것이다.

공 던지기는 원래 일본군의 수류탄 던지기 훈련이었던 것.

 

 

 

 

1970년대 한국 영화 '우리의 팔도강산'은 만주국 홍보영화 '개대환희(皆大歡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영화 '개대환희'는 근대화로 만주국의 발전상을 그린 영화였고 '우리의 팔도강산'1970년 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보여주는 영화로 홍보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시장경제에 맡기기 때문에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경제개발 계획은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방식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개발 계획 제안을 받았을 때 소련의 스탈린이 하던 공산주의 방식이라며 거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 쿠데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만주국의 인맥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기시 노부스케''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설계했고 박정희는 이걸 바탕으로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만주국은 중앙 통제형 개발 독재 시스템이었고 이것을 배워 박정희는 한국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국의 경제 정책이 전범 극우세력의 도움을 받았다는 부분이 놀랍고도 씁쓸하다.

 

​​만주국의 시스템이 한국 현대사의 발전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 고대사의 발상지로 안타깝게 잃어버린 영토로만 생각했는데 한반도와 많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만주국을 알면 우리의 현대사가 보인다

 

※내용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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